<쇠말뚝의 진실>-2

그럼 좀더 그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이 작업에 종사한 일본인이 죽기전에 남긴 말을 보자.

일제는 풍수침략을 위해 단순히 쇠말뚝만 사용하지 않았다. 지기를 누르기 위해 목침(木針), 석침(石針)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다. 이는 토지측량용이나 기타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는 주장이 타당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로는 서울 창덕궁 인정전 뒷산(백악산 끝자락) 지하 18m에 박힌 석침 7개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1941년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신세우씨(1988년 작고)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경력으로 일본군 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통역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에 야마시타가 이끌던 제14방면군은 필리핀 전선에서 미군에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이때 신세우씨는 야마시타와 함께 필리핀 다바오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영어가 유창했던 세우씨는 수용소에서 미군과 일본군 장성들의 의사 소통을 돕는 등 ‘대변인’ 역할을 했다. 또한 종전 뒤 벌어진 전범재판 때도 야마시타 등 일본군 장성들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

재판 2심에서 야마시타는 세우씨의 변론 덕에 총살형에서 교수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체나마 깨끗이 보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
선고 며칠 뒤 야마시타는 감옥에서 죽기 직전 은인인 세우씨에게 놀라운 비밀을 고백했다고 한다. 과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 일대에서 수탈한 보물들의 행방에 관한 것 등이었다.
===========================================================================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한 신씨는 아들 동식씨(54·동양양생원 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부자가 전국을 돌며 혈침을 제거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창덕궁 인정전 뒷산에 있던 석침의 존재도 알려졌다. 야마시타가 선친에게 일러준 장소를 확인한 동식씨는 97년 5월5일 관할 구청의 허가를 받아 굴삭기로 땅을 파보기로 했다. 지하 18m를 파들어가보니 과연 석침이 있었다. 문제의 석침은 모두 7개였고,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든 견고한 화강암재 석침이 틀림없었다. 이곳에 인공 화강암이 들어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야마시타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신동식씨의 말.

“석침이 있는 곳은 사람으로 치면 단중혈(가슴과 가슴 사이의 혈)로 이 산의 중요한 혈이다. 내가 선친께 들은 바로는 일제는 남한에 183개, 북한에 182개 등 모두 365개의 혈침을 박았다. 혈침은 전국 산의 중요한 혈에 하나씩 박았다. 어떤 산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의 인중혈에, 어떤 산은 가슴의 단중혈에, 또 어떤 산은 생식기의 회음혈에 박는 등 그 산의 가장 특징적인 곳을 찍어서 산의 힘을 빼버렸다. 또 이를 보조하기 위해 산마다 내침(內針) 6개와 외침(外針) 12개를 덧붙여 박았다.”

신씨는 혈침을 제거하러 다니는 동안 일제가 매우 악랄하게 풍수침략을 자행했음을 알았다고 말한다. 바위에다 5~6m 깊이로 쇠말뚝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은 다음 끝이 화살표처럼 생긴 쇠말뚝을 박아 빠지지 않게 했고, 또 틈새에는 석회까지 발라 단단하게 굳혀 놓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쇠말뚝이 어떻게 토지 측량용이 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한다. 출처: 김두규 전주 우석대 교수·풍수학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그덕에 일제는 우리의 풍수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